나는 빈곤한 자다.
내 집 마련은 꿈도 못 꾸지.
하지만 나이 50세 전후로는 시골의 작은 집이라도 마련할 수 있을까 조심스래 꿈 꿔 본다.(아무도 모르게 꾸는 꿈)
아직 아무 구체적 계획은 없다.
자금적으로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나의 집 로망.
1. 흰 레이스를 덮은 피아노.
그랜드피아노까지는 아니여도 꼭 아날로그 피아노여야 한다. 디지털 피아노는 그 멋이 안 나.
이웃에 피해가 안 가려면 디지털 피아노를 헤드셋 끼고 연주해야만 한다.(BUT, 난 피아노 연주를 못함. 이건 논외로 하자.)
내 로망은 시골의 단독주택.
서영 집 앞을 지나가다보면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발걸음을 멈춰서 그 소리를 듣다 가기를 바래요.
2. 화려한 고전분위기의 샹들리에.
절대 모던한 샹들리에는 안 된다.
샹들리에, 로망이다.
3. 빈티지 엔틱 괘종시계.
어릴 때 읽은 외국동화 중에 생쥐가 괘종시계 안에 숨어서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생쥐가 무슨 수프를 만들어서... 스토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도서관에서 엄마랑 읽었던 동화였다.
나는 인어공주나 백설공주를 읽고 싶어했고, 엄마는 그런 유치한 책 읽지 말라며 글이 많은 무슨 생쥐수프 어쩌구 책을 나에게 쥐어주었지.
나는 서러운 마음 참으며 읽어나갔는데 엄마가 조용하게 읽으라고 혼냈다. 속으로 읽으라고 했는데 나는 속으로 읽는 방법을 몰랐다.(진심... 속으로 어떻게 읽는지 방법을 몰랐음. 막 한글을 배우는 애기는 소리내어 읽는 방법밖에는 모른다.) 서러웠던 기억이 있는데.
근데 나중에 엄마가 나보고 책 제대로 읽었냐며 읽은 내용을 말하라고 했다. 괘종시계에 숨은 생쥐...
내 무의식 속에 그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때는 서러움, 억울함 가득인데 지금 생각하니 웃긴다.
엄마가 나 도서관 데리고 다니신것도 감사하고, 교육열 빡셌던 엄마가 생각나서 더 웃긴다.
언니기 결혼했을 때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언니에게 그랬다.
나중에 애 낳으면 엄마한테 맡기라고. 엄마가 스카이캐슬처럼 애 잡고 가르친다고... 진심이 느껴졌다. 엄마라면 진짜 그럴듯.
자식에서 못 이룬 명문대 보내가 꿈을 손주로 이루려나.
초등학생 때 부터 엄마가 나를 잡고 수학을 가르치셨다. 수학문제 틀릴 때 마다 엄마가 내 머리를 쥐어박아서 나는 수학이 무섭다. 결국 난 중1 때 수포자가 되고 말았다.
맞벌이 가정인 우리 집은 엄마 퇴근 전까지 수학 문제집 3장을 풀어야 했다. 나는 못 풀었고 엄마에게 매일 혼났다. 지지고 볶던 어느 날, 엄마가 주저앉아 한탄하며 말했다. "엄마는 매일 다짐해. 아이고, 오늘 퇴근하면 절대 우리 희송이 혼내지 말아야지 하고. 그런데 또 혼냈잖아. 엄마는 매일매일이 괴로워..."
그런 말을 하는 엄마는 정말 괴로워 보였다. 나는 그런 생각도 못했다. 날 혼내는 게 엄마에게도 고통이라는 생각. 그저 엄마는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충격적이었는지 내 기억 속아 오래 남아있다.
그 당시 엄마를 지금은 이해한다. 부지런 완벽주의 슈퍼우먼이 오죽했겠나 싶다. 살림도 육아도 모두 잘하고 싶었던 30대 여성. 당시에는 맞벌이가 흔치 않았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초면인데도 바로 친구되어 놀던 90년대.)이랑 놀다보면 친구 엄마들이 와서 묻는다.
친구 엄마1: "너희 엄마는 뭐해?"
나: "맞벌이 하셔서 직장 다니세요."
친구1(처음보는 애새끼): "엄마, 맞벌이가 뭐야?"
친구 엄마2: "어머, 부럽다! 나도 일 다니고 싶다."
친구 엄마1: (존나 뜬금없이)"얘, 너 공부 못하지?"
나: "아니요."
친구 엄마1: "어머, 얘 좀 봐? 참 내, 너 몇 등인데?"
나: "1등이요."
친구 엄마1: "니가 1등이라고? 거짓말하는 것 좀 봐?."
친구2(같은 반): "아줌마 얘 우리 반 1등 맞아요."
이런 대화가 말도 안 된다고? 나는 94년 생. 나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저 대화 흐름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여자는 남자 잘 만나서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집에서 애나 키우는 게 팔자 편한 것이고 위너라는 사상이 당연했다. 요즘처럼 알파걸들이 직장 다니는 거라는 생각이 없었다.
아니, 요즘은 맞벌이 안 하면 살기 힘든 세상이어서 맞벌이기 당연하지. 무려 30년 전이니까 지금과 다르지.
그 친구 엄마들은 우리 아빠 직업도 물었다. 울 아빠는 대기업이었고 친구 엄마들은 믿는 사람 반, 못 믿는 사람 반이었다. 나 부터도 엄마는 왜 다른 집 엄마처럼 집에 있지 않냐고 울고불고 못을 박았었다. 후회된다.
엄마도 대학 나왔고 집에 들어앉아 있기 보다는 사회생활 하고 싶고 그 마음을 초등 1,2학년 정도인 내가 알았겠냐만은.
친척노인들이 애기인 나한테 와서 슬며시 물었다. 아빠 얼마 버냐고. 아빠는 얼마 벌고 엄마는 얼마 벌어요라고 하면 엄마도 돈을 버냐고 놀라던 반응들도 선명하다. 그런 시대였다.
내가 어디 나가서 못난 모습을 보이면 그 화살이 엄마에게 꽂힐 게 뻔했다. 엄마가 애 안 돌보고 밖으로 휘돌아다닌다는 그 당시 비합리적 선입견.
엄마 성격에 얼마나 나와 언니를 엄하게 길러야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간다. 언제나 어른스럽고 예의바르고 공부를 잘해야 했던 나의 초등학생 저학년 시절.
동갑인 애들은 얼마나 동물같았는지, 시끄럽게 떠들고 잡기 놀이한다고 뛰어다니고...난 그 모습을 통제하다가 지쳐서 포기한다. 그러면 어른들이 갑자기 나에게 와서 뭐라고 그럼.
어른들: "언니가 되어갖고 동생들 좀 잘 챙겨야지!"
난데없는 고함에 난 마음이 졸아붙는 느낌이었다.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니고 난 언니도 아니다. 애들은 와서 킥킥거린다. "언니래ㅋㅋㅋ 아저씨, 얘 우리랑 나이 똑같아요!ㅋㅋㅋ"
그러면 고함쳤던 어른들은 믿는 사람 반, 안 믿는 사람 반이다. 어릴 때 부터 키가 큰 내 탓이려니 한다.
난 내가 어릴 때 키 큰 것도 억울해. 지금에서야 내 긴 다리를 자랑스러워 하지만.(객관적으로 길다. 172cm)
나는 왜 이렇게 어린 시절 억눌린 감정이 많지.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억누르고 산다.
아이 때 아이답고 싶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막 뛰어다니고 소리 악악 지르고 친구 패버리고 싶다.
그리고 어른들이 날 보고 혀 차는 소리가 듣고 싶다.
그리고 유치원 선생님이건 초등학교 선생님이건 우르 엄마에게 전화해서 나를 문제아라고 말 해 줬으면 좋겠다.
난 왜 이렇게 마음이 섬세하지. 억울해 죽겠네.
나보다 억울한 일 투성이 인간들 널리고 널렸는데.
아예 엄마가 없던 어린시절 보낸 사람도 많은 거 알면서도.
4. 좌식경대.
노인 방 같아도 좋아.
그 따뜻한 온돌 느낌. 바닥 후끈후끈 등허리 지지기.
겨울이 크-
5. 푸른 빛 도는 수족관.
말해 뭐해. 저 중경삼림같은 분위기.
로망입니다.
이것으로 서영이 미래 집 로망이었습니다.
쉰 살 전후로 시골에 집 한 켠 마련해서 로망 이루겠습니다.
ps, 서영이 어릴 때 이름은 희송이었습니다~